https://youtu.be/g19EuryzWbE?si=rWSGhMfSfAAPeZpm
내가 살던 행성은 유달리 태양과 가까웠다
그리고 작았다
떠나온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과거형으로 문장을 완성했지만 그 행성의 존재는 현재진행형이다
태양과 가깝기 때문에 뜨거운 게 일상인 행성에서 태어나
내가 ‘나’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는 행성에 소속된 인간으로 행성을 위해서, 행성에 의해서만 탄생되고 소멸된다
그 행성에 발을 딛고 살아갈 시기 가장 마지막으로 전달받은 업무는 ‘지구파견’
지구에서 지구의 생활과 지구인들의 특성과 지구라는 행성에 필요한 덕목들을 관찰하고 보고하는 일이 내가 맡은 일이다
이런 일이 왜 필요한가 싶겠지만,
내가 살던 곳은 이런 일이 필요한 행성이다
너무 작고 너무 뜨겁고 시간이 지구보다 훨씬 빠르게 흘러가는 곳이기 때문에
그 행성에선 재배될 수 있는 생물이 없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뜨겁다는 행성의 특성을 이용해 열을 다양한 에너지로 변환시켜 타행성의 시간과 재화로 교환하는 일이 그 행성의 주요 업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행성은 늘 다른 행성의 상황에 기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우주 무역에서 가장 손해보는 행성이지만,
완전히 득보지는 못해도 실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선 해야만 한다
나는 행성의 공무원이다
지구파견직으로 지구에 왔다
지구에서 발생되는 일들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 내 일이다
나 말고도 지구 곳곳에 내 동료들이 있다
내 동료들과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러나 가끔은 어설프게
사회초년생이라는 단어로 나의 실수를 최대한 포장하고
지구인 흉내를 내며 그 삶을 모방해왔다

내가 지구에 와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이곳의 언어를 배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언어를 단기간에 습득해도 그 삶 속에 녹아드는 것은 쉽지 않다
세계 각국마다 다른 지형, 그래서 발생되는 다른 기후들
그곳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 습관
그 습관이 견고해지거나 변화하거나 또는 탈락하는 과정에서 언어도 탄생된다
그러니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문화가 총체적으로 담겨있는, 문자 이상의 것이다
내가 섞이길 원하는 집단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많은 단어를 알아도 자연스럽게 섞이기 어렵다
단순히 인사는 주고받아도 감정적인 교류까지는 도달할 수 없다
그러니까
자꾸만 외로운 거야
말이 통하는 사람이 이 지구엔 하나도 없잖아
https://youtu.be/Db_mZ_2gtLg?si=3Y8bdew35KQJ8YBi
그러나 나를 위로해주는 계절
인간이 이 지구에서 발 딛고 서있다는 말은,
살아있기 때문에 참된 명제다
살아있다는 건 죽었다는 말과 반대되는 뜻을 가지고 있다
죽었다는 건 말 그대로 숨이 멎었다는 것
따라서 삶의 어떤 것도 더는 감각할 수 없다는 것
인간이 살아있음을 인지하는 모든 경우는 감각하는 순간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순간들
그러니 여름은 인간을 더욱 살아있게 만드는 계절이다
정수리가 타들어가는 감각으로,
축축하게 젖어드는 옷이 내 피부에 달라붙는 감각으로,
내리쬐는 햇빛에 얼굴이 따끔거리는 그런 감각으로
사람들과 겉도는 상태로 그저 관찰한 내용을 기록하는,
매일이 생경하기 그지없는 지구 안에서의 하루를 조금 즐겁게 해주는,
매년 더 뜨거워지는 여름 안에서
살아있음을 무한히 감각하며 보낼 수 있음을
기쁘게 여긴다
내가 살던 행성과 가장 닮은 날씨를 가진 계절

바다를 보기 위해 지구에 머무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실은 바다 근처에서 영영 머무르고 싶었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야 할 그 행성엔 바다라는 게 없다
지구에 발 딛고 사는 동안 많이 봐둬야지 생각했다
내 발목 위로 일렁이는 파도의 감각을
내 코끝을 찌르는 이 짠내를 영원히 기억해야지
돌아간 이후에 바다가 보고 싶어지면 나는
지금 이 감각들을 떠올리며 잠깐 행복해질 테다

그 행성엔 풀이 없다
지구에선 당연한 모든 것들이 없다
외계인으로 불리지만 사실 그건 어디까지나 지구의 규정에 맞게 지어진 이름이며, 실제로 그 행성에서는 인간이라는 카테고리 자체가 없다
살아있는 생물은 모두 행성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전제가 유일하기 때문에 종의 구분 없이 모두가 평등하다
그리고 그 행성은
하루라는 단위가 무색할 만큼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
수면과 휴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 행성에선 말 그대로 태어난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에너지를 타행성과 교환 가능한 요소들로 변환시키는 일만 한다
따라서
그 행성엔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다
서로에게 기대고 교감할 정도의 시간이 있지 않다
행성에서는 탄생된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
그 행성에선 모든 인간과 그 외 다수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
나 역시 마찬가지
그렇다보니 생일이라는 것조차 생소하다
지구, 그 중에서도 지구인들이 향유하는 문화를 보고했을 때 그들은 모든 전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지구의 문화에 대해 보고한 날,
나는 지구에서 생일을 맞았다
그 행성 기준으로 따르자면
시간은 14:30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해 오래 고민했던 적이 있다
그 행성에 보고를 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지구에 존재하는 사랑을 이해해야만 했고, 그들을 이해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글쎄,
감정이라고 하기엔 사랑이라는 감정은 행복과 슬픔과 설렘과 우울 그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인간을 행동하게 만드는 감정 이상의 무언가 아닌가?
형상화를 하자니 우리가 아는 그게 맞는 걸까
사랑은 존재하는 게 맞나
온도가 올라가야 기체가 되고 온도가 내려가면 고체가 되는 액체처럼 외부의 자극이 있어야 언어와 행동으로 발생되지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사랑의 의미와 그 깊이에 대해서는 영영 모를 듯 했다
파도 위로 너울거리는 햇빛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처럼 명확하게 딱 떨어지는 현상이 아니었다
사랑은 아무래도 그 파도 아래 깊이 더 깊은 곳에 존재하고,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
따지자면 심해와 가장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태초에 물에서 자라 그곳에서 나왔지만
탄생 이후부터는 물 속에서 호흡하지 못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모든 지구인들처럼
명확하게 존재하지만 알 수 없는 모순 그런 거
지구의 바다와 지구인들
최대로 살아있음을 감각하는 계절엔 늘
그 바다로 뛰어드는 지구인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근거로,
한때는 그 바다 깊은 곳 심해에 사랑이 있는 줄로만 알았지

머지않아 돌아가야 한다
요즘은 행성과의 통신 오류가 잦다
향후 지구와의 거래가 어려울 것 같다는 의미다
이 작은 행성에서도 각국의 이익에 따라 무역을 하는 것처럼,
우주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몇 년 동안 지구의 위기가 너무 잦았다
오직 타 행성과의 교류로만 지금까지 유지되어온 행성이라
교류 중인 행성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이상으로 피해를 입는 곳이다
따라서 최근 그 행성에서는 지구와의 계약을 오는 여름에 마무리 짓고 다른 행성들과의 계약 조건을 보완할 생각인 듯하다

아직 확실한 건 없다
그러나 어쨌든 그 행성에 다녀와야 한다
미래가 어떻게 될 지 몰라도 나는 가서 보고를 해야만 하고
다시 돌아오게 된다고 하더라도 껍데기를 갈아끼우기 위해선 가야만 한다
나를 포함한 모든 동료들은 지구에서 자연스럽게 머무를 수 있는 껍데기를 착의하고 이 별에 왔다
하지만 껍데기라는 건 신발과 비슷해서 닳고 소모되는 성질을 가졌다
지구의 시간으로 27년 가량 사용했으니, 그 행성의 시간으로는 그의 네 배 이상에 달하는 시간 동안 쓰여진 거다
그러니 지구에 발 딛은 채로 계속 관찰을 하기 위해선 새로운 껍데기가 필요하다.
..
물론
다시 지구로 돌아올 수 있을지 그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 고위층의 판단에 달려있다
그 행성에서 일개 시민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지구에 발 딛고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짧다
https://youtu.be/TDT9mbFt-Sw?si=cUyoLKHWpc4XDHbv
외롭고 지루한 지구 생활 속에서 나와 주파수가 맞는 음악을 찾으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여러 번 말했던 것처럼 그 행성은
모두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소멸되는 과정 속에서 주어진 일을 해내는 것만이 전부다
지구에 존재하는 예술 같은 건 당연히 없다
지구인들이 말하는 사랑, 그리고 그들이 쓰는 언어에 담긴 문화를 이해하고자 나는 이 별에서 많은 예술 작품들을 감상했다
감상하는 과정에서 지켜보니 꽤 많은 지구인들이 예술 작품을 통해 사랑에 빠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구에서 예술이란 건 ..
나와 주파수가 맞는 사람을 찾아내기 위한 프로토콜과 유사하다는 거지
종종 나와 주파수가 맞는 사람을 찾게되면 어쩌나 걱정도 했지만 .. 내 취향은 보통 지구인들의 유행보다 몇 년 더 빠르게 작용했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행성에서 살다와서 그런가봐
아무래도 지구에선 만나기 힘들겠지

모든 희망은 체념과 동시에 찾아온다
나는 정말 이 별에선 나와 주파수가 맞는 사람을 영영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
물론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비슷한 사람을 찾았다
아직도 텅 비어있는 ‘사랑’ 카테고리
보고를 하기 위해선 추상적인 대상에 관해 딱 떨어지는 문장을 써야했는데,
전혀 알 수가 없으니 사랑에 관해서는 단 한 단어도 기재하지 못했다
..
그래서 나는 네가 말하는 사랑이 너무 궁금했고
가까이서 느껴보고 싶었지
지구인으로 태어나 바다에 빠진다는 일이
딱히 심해 안의 사랑을 찾기 위함은 아니라고 하던데
걔가 꿈꾸고 느껴본 그 모든 사랑은 대체
어떤 종류의 사랑이길래
바닷속에서 키스를 하더라도 그 끝은 나의 숨을 상대에게 불어넣어주는 일로 끝이 날 텐데
내가 나로 태어나 오롯이 나로 살아간다는 일조차 쉽지 않은 이 행성에서, 내가 아닌 너에게 삶을 주고 싶다는 건 어떤 사랑일까 싶었다
비가 내려도 눈이 내려도 젖지 않는 바다 안에서
그러나 호흡도 언어도 발생되지 못하는 인간으로 너는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길래
그런 작품을 만들어온 거지?

내 주파수에 맞는 문장으로 설명해줘
여름이 오기 전까지
그럼 나는 네가 말하는 방식으로 기록하고
영원히 널 사랑할게
그리고 꼭 다시 돌아올게

지구는 분명 내가 살던 곳에 비하면 무척이나 자유로운 별인데도 사람들은 늘 불안하거나 우울해했다
나는 그조차도 모두 기록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구인들의 슬픔에 대해 몇 년 동안 기록을 하다보니 같이 슬퍼질 때도 많았다
내가 사는 곳은 기본적으로 행성 전체를 소수의 고위 계층이 지배하는 구조다
하지만 지구는 아니잖아
그럼에도 발생되는 계급 아래에서 지구인들은 본인에게 주어진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모든 지구인들이 행복해진다면 그 행성은 지구와의 계약을 연장할 테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구인들이 행복하길 바라고
행복해지기 위해 남들이 정해둔 길을 빨리 벗어나라는 말을 하고 싶다
시험을 위해 모두 같은 것만 배우고, 일을 하기 위해 비슷한 자격증을 준비하고, 이후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오늘을 묶어두는 하루들
지구는 자유로운 별이다
정해진 길을 벗어나는 순간 내가 오롯이 나로 살 수도 있는 곳이다
남들이 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발 맞춰 달리고 있다고들 하지만
그렇게 달리고 있는 남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다들 그렇다는 건 누군가 정해둔 길이 잘못됐다는 의미다
다들 달리는 걸 멈추고 본인이 서있는 길 바깥의 풍경을 보길 바란다
그 풍경 속에서 가고 싶은 목적지를 정하고
원하는 속도로 그곳에 도달하길
지구에서의 삶이 부디 행복할 수 있길
https://youtu.be/zcf3f7ptYbw?si=DsnoOxJtTl77uogl
어제보다 더 뜨겁게 감각하는 삶 속에서
살아있음을 스스로 느낄 수 있다는 게 정말 기뻤던
지구의 여름
내 발을 적시던 바다와
여름밤 창문을 활짝 열고 달리면 내 코끝을 찌르던 그 모든 풀내음
외롭고 지루한 삶을 채워주던 작은 솜뭉치와
주파수가 비슷한 그 애
가끔은 이 모든 것을 떠안고 함께 우주로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지구 안에서 자라나는 것들은 모두 지구별에서만 호흡할 수 있는 것들
작고 뜨겁고 늘 빠르게 돌아가는 행성에선 금방 죽어버릴 테다
그러니 그 행성으로 돌아가서도 이 모든 감각들을 잊을 수 없게
여름이 오기 전까지 더 많이 껴안아야지

안녕
마지막일지 여느때와 같은 평범한 인사일지 나조차도 확신이 없어
그치만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좋을 것 같아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졌다는 빨간 장미의 향기를 맡으며
모든 의미는 미지수로 남겨둔 채로
안녕!